PKwon/goola
[Pkwon] 쿠오바디스
李蘭胡
2024. 6. 8. 00:14
쿠오바디스
Domine Quo Vadis:?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라는 말은,
폴스카 작가 셴케비츠의 소설로 유명해졌으나 이전부터 있던 전설입니다.
그러나 기원 150년경부터 나온 전설로 실제 베드로의 행적과 큰 관계는 없어 보입니다. (베드로는 첫 교황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 하려면 일생이 필요하므로 이 정도로 합니다.)
잘 알려진 대로 베드로는 로마에서 큰 박해가 생긴다는 소문을 듣고 도망가는데,
예수가 갑자기 나타나니,
베드로가 묻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가 대답하기를,
(네가 도망가고 있으니) 내가 로마에 돌아가서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겠다.
그러자, 베드로는 다시 로마로 돌아가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전설입니다.
그런데,
센케비츠느 폴스카 인들의 독립의지를 높이기 위해 이 소설을 썼습니다만,
이 시절만 해도 이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던 것이고,
그런 사람들은,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때에 다 죽었습니다. 그 이전에도 여러 차례 죽었지만!
전략적으로 볼 때,
베드로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보다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고 알려진 예수가 십자가에 다시 못박히는 게,
훨씬 그 영향이 크지 않겠습니까?
죽었다는 예수가 다시 나타는 순간 , 예수를 십자가에 다시 못박았을 지는 모르겠으나, 패닉이 왔을 겁니다. (이 이야기 하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대신문관 이야기도 해야 하지만 오늘은 넘어 갑니다.)
반면에, 력사에 보면 베드로가 죽었다고 해서 그다지 큰 영향은 없었고, 박해는 여전히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셴케비츠가 쿠오바디스를 쓴 1895년만 해도,
사람들이 그런 사고를 할 수 없었던 겁니다. 니체라면 가능했을 지 모르겠으나 그는 정신 병원에 있었습니다.
예수가 어떻게 되건 말건, 베드로는 제 갈 길을 가야겠습니다 하면, 예수가 베드로를 죽일 겁니까, 뭡니까? 죽인들, 무슨 의미입니까? 적어도 거꾸로 십자가에 달리는 것보다는 편히 죽었을 겁니다.
이런 사고가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1차대전, 2차대전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전도사인지 먹사인지가 말하기를,
전광훈 등이 문재인을 비판하는 집회를 여는 것를 까면서,
문재인이 아무리 좆같아도 그도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다. 하나님이 그놈을 세운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 세운 것이 아니겠는가? 바로 전광훈 같은 사람들의 위선을 보여 주기 위해서 세웠다 이리 말했습니다.
===
1차대전, 2차대전 (한국의 경우는 6.25)를 통하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닝의 뜻, 하나님의 경륜을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훨씬 이성적이고 타산적이게 되었습니다.
일제 시대 소설을 보면 왜 사람들이 이렇게 행동하나 답답한 일이 많았는데,
1950년대 소설 (잘 읽혀지지는 않음)을 보면 전쟁 후 가치관이 완조니 변하고 정조 관념도 많이 약해진 것이 보입니다.
리범선 (북한에서 상당히 잘살았으나 남한에 내려와서는 그냥 평범한 글쟁이가 된 걸 평생 한탄함) 의 오발탄은 그런 사회에 적응을 못 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환난을 거치면, 도태되는 사람들도 있고, 살아 남은 사람들의 가치관은 완전히 변하는 것입니다. 본 글아 약긴 기독교적이어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1945년 (한국의 경우는 1953년) 이전의 책들은, 읽을 필요 없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이 때부터 지식의 폭발이 일어났고 생각하는 것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
인생에 있어서,
이미 떠나온 시궁창에 다시 들어가라는 사람이 있으면,
너나 들어가라고 말할 일입니다.
폴스카 작가 셴케비츠의 소설로 유명해졌으나 이전부터 있던 전설입니다.
그러나 기원 150년경부터 나온 전설로 실제 베드로의 행적과 큰 관계는 없어 보입니다. (베드로는 첫 교황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 하려면 일생이 필요하므로 이 정도로 합니다.)
잘 알려진 대로 베드로는 로마에서 큰 박해가 생긴다는 소문을 듣고 도망가는데,
예수가 갑자기 나타나니,
베드로가 묻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가 대답하기를,
(네가 도망가고 있으니) 내가 로마에 돌아가서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겠다.
그러자, 베드로는 다시 로마로 돌아가 거꾸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 전설입니다.
그런데,
센케비츠느 폴스카 인들의 독립의지를 높이기 위해 이 소설을 썼습니다만,
이 시절만 해도 이 이야기를 믿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던 것이고,
그런 사람들은,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때에 다 죽었습니다. 그 이전에도 여러 차례 죽었지만!
전략적으로 볼 때,
베드로가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보다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고 알려진 예수가 십자가에 다시 못박히는 게,
훨씬 그 영향이 크지 않겠습니까?
죽었다는 예수가 다시 나타는 순간 , 예수를 십자가에 다시 못박았을 지는 모르겠으나, 패닉이 왔을 겁니다. (이 이야기 하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대신문관 이야기도 해야 하지만 오늘은 넘어 갑니다.)
반면에, 력사에 보면 베드로가 죽었다고 해서 그다지 큰 영향은 없었고, 박해는 여전히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셴케비츠가 쿠오바디스를 쓴 1895년만 해도,
사람들이 그런 사고를 할 수 없었던 겁니다. 니체라면 가능했을 지 모르겠으나 그는 정신 병원에 있었습니다.
예수가 어떻게 되건 말건, 베드로는 제 갈 길을 가야겠습니다 하면, 예수가 베드로를 죽일 겁니까, 뭡니까? 죽인들, 무슨 의미입니까? 적어도 거꾸로 십자가에 달리는 것보다는 편히 죽었을 겁니다.
이런 사고가 가능하게 하기 위하여,
1차대전, 2차대전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전도사인지 먹사인지가 말하기를,
전광훈 등이 문재인을 비판하는 집회를 여는 것를 까면서,
문재인이 아무리 좆같아도 그도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다. 하나님이 그놈을 세운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 세운 것이 아니겠는가? 바로 전광훈 같은 사람들의 위선을 보여 주기 위해서 세웠다 이리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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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대전, 2차대전 (한국의 경우는 6.25)를 통하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닝의 뜻, 하나님의 경륜을 믿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훨씬 이성적이고 타산적이게 되었습니다.
일제 시대 소설을 보면 왜 사람들이 이렇게 행동하나 답답한 일이 많았는데,
1950년대 소설 (잘 읽혀지지는 않음)을 보면 전쟁 후 가치관이 완조니 변하고 정조 관념도 많이 약해진 것이 보입니다.
리범선 (북한에서 상당히 잘살았으나 남한에 내려와서는 그냥 평범한 글쟁이가 된 걸 평생 한탄함) 의 오발탄은 그런 사회에 적응을 못 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엄청난 환난을 거치면, 도태되는 사람들도 있고, 살아 남은 사람들의 가치관은 완전히 변하는 것입니다. 본 글아 약긴 기독교적이어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1945년 (한국의 경우는 1953년) 이전의 책들은, 읽을 필요 없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입니다. 이 때부터 지식의 폭발이 일어났고 생각하는 것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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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있어서,
이미 떠나온 시궁창에 다시 들어가라는 사람이 있으면,
너나 들어가라고 말할 일입니다.
- 2021-11-07(1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