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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Kwon] 신선조의 매력

李蘭胡 2024. 6. 16. 15:20

신선조의 매력

(신센구미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그냥 신선조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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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조는 막부 말기에 유신세력을 때려잡기 위해 만들어진 조직인데,

규율이 엄하여, 자기들끼리 죽인 것으로 더 유명합니다.

시바 료타로도 '신선조혈풍록' 이란 단편집을 내기도 했지만, 일부는 소설이고 사실이 아닌 것도 있습니다.

어쨌든, 비록 신선조가 막부 편에서 싸우고 유신, 신정부에 대적한 조적(조정의 적) 이긴 하지만,

이미 신선조의 세력이 사라졌기 때문에 더 이상 정권에 위협이 안되니, 이들을 비장하다고 추억하는 글들이 많았으며 결국 신선조는 일본의 전통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신선조의 활동이 얼마나 막부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소위 유신 삼걸이라는 인물도 하나도 못 죽였고, 그들이 죽인 사람들 중 유명인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카모토 료마 살해는 이들이 부인했고 누가 했는지는 영원히 모름)

그러나 어쨌든, 막부가 아직 안 죽었다는 것은 보여 주었으므로, 사기면에는 도움이 되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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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조라고 해서 구태의연한 전략만 쓴 것은 아니었습니다. 신선조의 사실상 제2인자인 히지카타 도시조는 양복 입기를 좋아하여, 신선조 때도 서양 군복을 입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구세대를 지킨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전통세력을 지키려는 무리들이니만큼, 그에 따르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입니다.

신선조의 대장인 곤도 이사미는 쉽게 말해 동네 건달이었습니다. 집은 먹고는 살 수준이었으나 3남이라 물려받을 게 없으니 어려서부터 자기 '밥벌이' 를 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히지카타는, 엉터리 약을 파는 약장수였습니다.

나머지 사람들도 그리 내세울 만한 배경을 가진 이는 없었고,

한 마디로, 혼란한 세상에서, 오로지,

'출세하기 위해'

신선조에 들어온 것입니다.

신선조는 이런저런 '활동' 을 하다가, 1868년 막부군이 교토를 상실하자, 막부군을 따라 에도로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막부에서는,

그 동안 신선조가 막부를 위해 견마지로한 공을 높이 사서,

곤도 이사미에게 '10만석' 의 칭호를 주었습니다.

혼란한 시대라 영지를 줄 겨를은 없었으나, 곤도 이사미는 중급 영주들과 같은 예우를 받게 되었으며,

더우기 그를 '와카도시요리' 로 가임명했습니다. (가임명 - 쉬운 말로 임명대기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와카도시요리가 무엇인고 하니,

막부에서 실질적으로 행정을 담당하는 총수가 대로인데 대로는 언제나 있었던 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밑에서 국정을 결정하는 7인의 무리가 있었으니 이를 노중이라고 합니다.

노중 밑에서 그들을 보좌하는 4명이 있었으니 이를 약년기, 즉 와카도시요리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대로는 수상, 노중은 부수상, 약년기는 장관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습니다. 이외 쇼군에 따라 직제에 없는 별정직이 권력을 갖는 경우도 있었으나 이 이야기는 오늘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34세의 동네 건달 곤도 이사미가,

막부를 위해 칼질 하고 다닌 공적으로,

10만 석 영주에다 장관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바로 밑의 히지카타는 5만석 영주에, 약년기 밑의 직책에 임명되어, 약장수가 차관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키다 소지에게는 3만석 (정작 본인은 이를 알지 못하고 죽었음), 기타 중요한 몇명에게 2만석씩 주고 모두 막부의 관직을 내려, 쉬운 말로 다들 영주가 된 것입니다.

물론 얼마 가지 않아 곤도 이사미는 잡혀 처형되고, 다음해 히지카타 도시조도 북해도에서 전사하나,

하꼬 인생들이, 구세데를 위해 견마지로한 덕분에,

사무라이가 된 것 뿐만 아니라, 영주가 되고, 장관이 되고, 잠시나마 평상시에는 꿈도 못꿀 엄청난 출세를 하였습니다!

(실제로 곤도가 잡혀 죽은 것도, 답없는 촌에서 장관이 나왔다고 고향에서 잔치를 3일이나 해서, 술에 취해 전투에 참가했다가 잡혀 죽은 것임)

이렇게 혼란기에서 구세대를 지키려 하면, 오래 갈 지는 모르겠으나 대출세를 할 기회는 생기는 겁니다.
 
  • 2021-05-18(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