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history2020. 7. 25. 2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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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na Betrayed Into Communism

China is still governed by a single regime, the Communist Party, which requires members to be atheists, imprisons dissidents without due process, oppresses Tibet, and enforces a policy, backed by compulsory abortion, restricting most families to one chi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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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mes Perloff라는 학자가 2009년 7월 The New American 잡지에 개재한 글입니다. 원문의 제목은 "공산주의에게 침략당한 중국" 정도인데요. 저자가 미국 기준으로도 강성 우익에 해당되고, 이 글은 반공 음모론이 살짝 섞이고 FDR 정부 당시 미 국무부를 매우 비판적으로 보기 때문에 거북할 수도 있습니다.

​ 목차별로 논조를 요악하자면 이렇습니다


일본과 만주

1930년에 아시아 거대 반공국가였던 일본제국은 아시아를 공산화하려는 소련에게 매우 거슬리는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스탈린은 미국과 일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그렇게 되면 시베리아 국경의 안전을 확보하고 일본의 힘이 약해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발언은 미국 공산당 창립 멤버인 Benjamin Gitlow의 회고에서 나옵니다.

"내가 모스크바에 있었을 때, 전쟁 발발 시 미국에 대한 반응이 논의되었다. 비공식적으로 미국과 일본 사이의 경쟁이 두 나라의 전쟁이 실제로 발발해야 한다는 게 내가 만난 러시아 지도자들의 견해였다"

그리고 1935년 William C. Bullitt 러시아 주재 미국대사는 Cordell Hull 국무장관에게 파견을 보냈는데, 요약하면 "소련은 전쟁이 발발할 경우 미국의 동맹국이 된다는 생각은 큰 착각이고, 소련은 일본의 패배가 확실하기 전까진 동맹이 되지 않을 것이고, 그 후 만주를 얻고 중국을 공산화 시키는 게 목표". 정도입니다.

그리고 1930년대의 일본의 만주 사변은 분명히 제국주의적인 침략 전쟁이었지만 소련이 신장 지역과 외몽골에서의 팽창 때문에 자극을 받았다는 거는 언급이 안 됩니다.(글쓴이는 동투르키스탄과 봉소전쟁을 가리키는 거 같습니다) 국무부는 소련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1928년까지 소련에서 국민당을 장악하려고 간첩들을 집어넣다가 장제스에게 걸려서 소련 요원들을 추방시킨 사건이 있는데,  당시 미국에서 가장 저명한 외교 저널인 Foreign Affairs에서는 장제스만 비난하는 기사를 썼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장제스는 미국이고 소련이고 모두의 비난의 대상이 됩니다.

붉은 중국 : 소련의 괴뢰

제목이 곧 내용입니다. 중국 공산당은 소련 딸랑이나 마찬가지 였습니다. 30년대엔 항일하지 말고 국민정부나 상대하라고 지령 내렸는데 별 말없이 고분고분 따랐습니다. 이는 중일전쟁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자는 국민정부 전복이고 후자는 세력 확장 겸 독소전쟁 중에 일본을 자극하지 말라는 목적이라는 게 차이점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 마오쩌둥의 "70%는 세력 확대에 20%는 국민정부 상대에 나머지 10% 항일" 발언 언급은 덤이고요. 글쓴 저자의 성향상 태평양 전쟁은 소련이 일본 군부를 자극해서 일어난 거라는 음모론적인 주장을 하는데 저는 이것 까지는 믿지 않습니다.


루스벨트의 배신

중화민국에게 있어서 테헤란 회담과 얄타 회담은 미국의 배신 그 자체였습니다. 이유는 소련의 대일전 참전 여부에서 나오는데, 스탈린은 대일전 참전 조건으로 자신의 극동군에게 약 3천 대의 전차와 5천 대의 항공기, 125만 명에게 필요한 군수품을 요구했습니다. 루스벨트는 이걸 받아들이고, 이는 4년 동안 탱커짓을 하던 국민당군이 받은 랜드리스보다 두 배 많은 많은 수치였습니다. 

그리고 태평양으로 보급하기 위한 선박 100척이 북태평양을 통해 소련을 통해 소련군에게 보급되었다고 언급하고, 또한 회담 당시 만주 철도의 공동 통제뿐만 아니라 만주 항구와 뤼순 항구의 통제도 요구했는데 루스벨트는 중국과 상의도 안 하고 의회의 동의도 없이 다른 나라의 주권을 갖다 버렸다고 언급합니다.

그리고 얄타 협정에서 참여한 미국 국무부 대표 알저 히스(Alger Hiss)는 소련의 간첩이었습니다. 패트릭 헐리 주중 미국 대사의 말을 인용하면.

"미국 외교관들은 중국의 영토 보존과 정치적 독립을 포기했다... 얄타에서 비밀리 중국의 공산화의 청사진을 작성했다."


초치는 조

역시나 중일전쟁 최대의 트롤러이자 연합군의 몇 안되는 X별, 조지프 스틸웰의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습니다. 스틸웰은 장제스를 땅콩이라고 비난하면서 공산당을 찬양하고, 주더와 함께 전쟁 하기 싫다는 망언까지 했습니다. 스틸웰이 버마 작전에서 국민당군 정예 사단 날리고 전부 장제스 탓으로 돌린 건 유명하니 제외하겠습니다. 장제스는 "스틸웰은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공산당과 공모했다."라고 비난했고, 패트릭 헐리 대사는 "스틸웰 장군의 기록은 중국 국민 정부를 전복하고 그 자리에 공산주의 정권을 세우려는 음모로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워싱턴 정부 당시 존재했던 친공 세포가 조직에서 분리될 수 없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국무부 내 파벌

헐리 대사가 언급한 "세포"는 무었인가? 이는 중국 공산당이 중국 지배를 선호하는 국무성 내 친공 파벌을 말합니다. 젊은 변호사로 미국에서 소련의 입장을 대변하던 딘 애치슨(애치슨 라인을 만든 그 사람입니다.) 1941년 국무부 차관이 되었는데, 이후 국무부는 친소파벌이 점령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앞서 말한 소련 간첩 알저 히스와 존 카터 빈센트(John Carter Vincent) 극동국장, 루이스 부덴스(Louis Budenz), 존 슈트어트 서비스(John Stewart Service) 등등. 이 중에 존 서비스는 중국 공산당에게 기밀 유출했다는 혐의로 FBI에게 체포까지 되었습니다. 헐리는 미국에 돌아오자마자 이들을 짜르는 게 최우선이지만 이미 헐리보다 상관이 되어서 본인이 사임했습니다.


친공산주의 전략

앞서 국무부 내 친공 파벌은 온갖 편파적 시각과 날조로 장제스는 부패한 군벌, 파시스트 전체주의자로 만드는 반면, 마오쩌둥은 반대로 '소련과 다른 민주주의적인 농민 혁명가'로 포장 시키고 국공내전을 무슨 민주화 운동인 양 포장했습니다. 앨버트 웨드마이어는 이 문제에 대해 현실을 다음과 같이 전달했습니다.

"비록 중국 국민 정부가 권위주의나 전체주의로 비하적으로 묘사되었지만, 국민당의 궁극적인 목표는 입헌 공화국의 설립이었고 공산주의자들은 전체주의 독재 정권을 수립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었다. 장개석과 2년간 가깝게 지내면서, 나는 그가 개인적으로 솔직하고, 이기적이지 않은 지도자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국민들의 복지에 관심이 많았고, 헌정 정부를 세우기를 열망했다. "

국민정부에게 부정부패는 확실히 존재하지만, 그런 식으로 따지면 우리 정부에도 부패가 존재하다는 식으로 지적했고요.

2차 세계대전 이후 중국은 초인플레이션으로 경제가 망하고 있고, 이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해 미국의 금을 빌려줄 것을 요청했지만, 루스벨트는 승인을 했지만 해리 덱스터 화이트 재무장관이 부류하면서 중국 경제를 붕괴시키고 결과적으로 부정부패를 키우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해리 덱스터 화이트 재무장관도 나중엔 간첩 혐의를 받았습니다.

국무부의 마지막 결정타는 국민당-공산당 연립 정부 형성을 요구한 것인데, 이는 공산주의자들의 전통적인 통수 수법이라 볼 수 있었습니다. 정부에서 공산당과 강압적으로 연대를 하면서 다당제인양 포장하다가 최종적으로 공산주의 국가로 바꾸는 것. 이는 전후 폴란드, 체코, 유고슬라비아에서 이미 해본 수법이었습니다. 그리고 국회에 해당되는 국민대회에서 공산당은 소집을 거부했습니다. 폭력으로 권력을 차지하는 법을 알았기에 말이죠.


마셜 미션(Marshall Mission)

마셜 미션은 마셜 플랜과 비슷해 보이지만 실상은 조지 C. 마셜 장군의 몇 안 되는 실책이었습니다. 소련군에게 랜드리스 물자와 일본군 무기들을 노획한 공산당군과 국민당군은 국공내전으로 전면적인 공격을 시작되는데, 트루먼 대통령이 임명한 중국 특사였던 조지 마셜의 개입이 국민당군의 패배의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마셜 장군이 중국에 왔을 떼는 국민당군이 수적으로 공산당군을 압도하고 있었으나, 마셜 장군은 2차례의 휴전을 제안하고 그 기간 동안에는 공산당의 병력과 물자를 재배치하고 게릴라들의 훈련 기간을 벌어주었습니다. 이렇게 15개월간의 마셜 미션은 비참하게 끝나버렸습니다. 사실 마셜 장군도 앞에 말한 국무부와 스틸웰의 친공 언플짓 덕분에 생겨난 재앙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애초에 정치가도 아니였고요. 


미디어 역할


중공에게 미국 여론 조작은 가장 중요한 과정이었습니다. 수많은 책과 뉴스 보도들이 말하는 '민주 농민 개혁가'는 유혈 혁명 과정과 공산주의 독재정권을 수립했음에도 중화민국 부관참시는 이어졌습니다. 소련 외무장관이던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이러한 선전 공작을 설명했습니다.

"누가 공산주의 신문을 읽는가? 이미 공산주의자인 소수의 사람들만 읽는다. 우리는 그들을 선전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목표는 무엇인가? 누가 영향을 미칠까? 비공산주의자들을 공산주의자로 만들거나 속이고 싶다면 비공산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주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큰 언론에 침투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를 충족시키 듯. 미국의 영향력 있는 작가들은 마오쩌둥 찬양하는 책들을 집필했습니다. 대표적으로 Red Star Over China의 작가 에드가 스노우나 Thunder Out of China의 작가 오웬 래티모어라든지, 덧붙여서 에드가 스노우는 신문에서 마오쩌둥과 주더를 보고 링컨의 겸손함과 그랜트의 인내를 가졌다고 찬양하는 글을 기고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친공 서적들은 1943년 1949년 사이에 22권 서적들이 미국 언론에 주목받았고 반면, 친국민당 서적은 7권만 나오고 묻혀버렸습니다. 친공 서적들은 평단에서 엄청난 호평을 받았는데, 원인은 까놓고 말하면 작가들과 평론가들의 친목질이었습니다. 비슷한 작가들이 추천서를 쓰고, 평론을 하다 보니 아시아 문제에 거의 알지 못하는 미국인들은 선동되기 딱 좋은 위치였습니다.


IPR의 명확한 배신

미국의 극동정책에서 영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던 것이 지금은 없어진 IPR(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였습니다. 록펠러와 카네기 재단으로부터 보조금을 받고 세워진 이 기관은 미국 공립 학교와 군을 위해 수십만 개의 팸플릿을 발행했지만, 앞서 말한 마오쩌둥 찬양 신화를 주도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IPR에는 국무부 내의 친공파벌이 소속되어있었습니다. 결국 1945년 IPR는 미국 OSS에게 사무실을 압수수색당하고 도난당한 정부 문서를 발견되어서 FBI에게 체포되지만 대부분 기각되고 벌금형만 받았습니다. 

중국 원조

일본이 원자폭탄을 맞고 패망하면서 예정되었던 랜드리스는 마셜의 무기 금수 조치로 인해 1948년까지 취소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는 20억 이상 달러를 지원받았지만, 수치상 높아 보였는데 대부분 담배나 악성 재고들이었습니다. 1948년 4월, 절망적인 상황을 알게 된 미국 국회는 백만 달러 이상의 군사 원조를 승인했지만, 7개월이 되어서야 전달되었습니다. 참고로 됭케르크 철수 이후 영국으로 물자를 전달한 미국 선박들은 8일 만에 도착했습니다. 태평양과 대서양의 환경이 달라서 일까요? 

중국 붕괴

이 문단은 마무리라 별거 없고 장제스는 국부천대를 하고 중국은 공산당이 지배했지만 한동안 중공에 대한 환상, 이른바 중뽕질이 이어졌는데 한국전쟁 이후에야 중뽕이 사라졌다 이런 내용입니다.

이 글의 전부가 사실인 것은 각자 판단의 몫이지만, 친공 세력이 미국 여론을 주도한 것은 사실이며, 자나깨나 각종 정치 극단주의의 선동을 조심합시다.

 

Posted by 李蘭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