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규칙한 전쟁은 오래된 것이다. 현대 군대의 출현 전에 용병과 군벌들은 전쟁터를 어지럽히고 오늘날 소위 말하는 "게릴라 전술"을 폈다. 전문적인 군대를 만들어 낸 이후에도, 전쟁은 군사 모험가나, 이익에 끌리거나, 갈등을 맛볼 기회를 노리는 다른 스릴을 찾는 사람들을 끄는 자석으로 남아 있다. 19세기에 입법 조치를 지지하거나 비판하기 위한 긴 연설의 맥락에서 더 흔히 사용되고 있는 "의사 진행 방해"라는 용어가, 도시들과 심지어는 나라 전체를 사로잡는 다양한 독립적이고 승인되지 않은 군사적 모험가들에게 적용되었다.

 

다른 예로, 군사적 모험가들은 세계를 총력전 직전까지 밀어붙이는 데 기여 해주었는데, 특히 제1차 세계 대전의 끝난 후에 따른 영토 변화의 여파로 더욱 그랬다.

 

대담하고 항상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이 필리버스터들과 군사적 모험가들은 그들의 시대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결과를 다루고 있다.

 

10. 가브리엘레 단눈치오(Gabriele D’Annunzio)

 

1차 세계 대전 이후 이탈리아 정치의 거물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는 퇴폐적인 시인이자 소설가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그는 또한 잘 알려진 로타리오인 프리드리히 니체의 독실한 추종자로, 하우스 키퍼들을 불러 함께 잠들도록 종종 강요했고 자신을 '위대한 창조자'라고 부르는 자기 홍보자였다. 단눈치오는 또한 도덕적, 사회적"위생"으로서 폭력에 대한 초기 근본주의 파시스트 철학을 설교한 유명한 전쟁광이었다.

단눈치오는 이탈리아 북부 알프스를 넘는 데 필요한 시간 동안 공중에 떠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후, 1918년 합스부르크 비엔나에서 선전 비행을 시작했다. 민족주의적 전단지는 비엔나 시민들에게 이탈리아 공군이 폭탄을 떨어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지만 대신에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전쟁이 끝났고 북쪽과 아드리아 해에서의 이탈리아의 이익은 피할 수 없다고 경고하기로 했다.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단눈치오와 다른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은 베르사유 조약과 이탈리아의 토지 소유권 주장에 대한 존중 부족에 분노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이탈리아 육군과 해군 출신의 이탈리아 참전 군인인 단눈치오와, 무정부주의자, 사회주의자, 파시스트들이 유고슬라비아의 피우메(Fiume)시를 점령하고,"카르나로의 이탈리아 섭정 정부"로 이름을 다시 지었다. 단눈치오가 1920년에 공동 저술한 카르나로의 헌법에 따르면, 음악은 모든 예술에 우선적으로 주어졌으며, 개인의 평등에 관한 생디칼리스트의 개념은 협동조합주의적 경제와 쾌락주의로 혼합되었다.

베니토 무솔리니와 이탈리아 파시스트 운동에 분명한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단 눈치오는 결국 이탈리아 정부와 충돌했다. 1924년 1월, 이탈리아 군대는 카르나로를 공격했고 공식적으로 그 도시가 피우메로 편입되었다. 그 여파로 단눈치오는 가르다 호수에 있는 전용 별장로 은퇴했다.

9.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Roman von Ungern-Sternberg)

에스토니아의 독일 혈통의 귀족인 남작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은 반 볼세비키 장군, 군주제주의자이며 마지막으로 칸이 된 불교 전사로 유명하다. 1920년 러시아 내전 동안,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은 백계러시아인, 일본, 몽고, 타타르 군대로 이루어진 사설 군대를 중국의 점령하 몽골로 보냈다. 

몽골 민족주의자들의 지원을받은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1921년 2월 자신의 군대보다 더 큰 중국군으로부터 우르가(오늘날의 울란바토르)를 점령하면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지휘 아래, 몽골의 정신적이고 일시적인 통치자인 복드 칸이 권력을 잡았고, 운게른슈테른베르크는 몽골 외무부의 장군으로 임명되었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통치 기간 동안, 볼셰비키 용의자들은 고문 당하고 살해되는 반면, 유대인들은 초법적인 숙청을 위해 선발되었다.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몽골-러시아 귀족이 이끄는 재창조된 중화 제국의 꿈은 1920년 여름, 볼세비키가 우르가를 점령하기 위해 몽골로 들어갔을 때 깨졌다. 8월에, 볼세비키의 군대는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병력을 절반으로 나누고 " 미친 남작"을 생포했다. 그는 35살의 나이로 총살형에 처해졌다.

8. 윌리엄 워커(William Walker)

알렉스 콕스 감독의 1987년 실험 영화인 "워커"의 주제인 윌리엄 워커는 테네시에서 태어난 의사이자 언론인이었다. 19세기에 영어를 사용하는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자금을 대고 여러 명의 미국 용병들을 라틴 아메리카로 이끈 것으로 유명한 해졌다. 1855년 6월, 워커와 그의 사병은 곤경에 처한 니카라과 자유당의 요구에 따라 니카라과에 상륙했는데, 그들은 당시 중앙아메리카 전역의 다른 니카라과 보수 세력과 다른 우익 당파들과 싸우고 있었다.

워커는 조선공 및 자본가인 C.K 개리슨에 의해 재정적으로 지원받았다. 개리슨은 57 명의 캘리포니아 사람들과 함께 그라나다 레알레호에 상륙하여 10월까지 그라나다를 장악했다. 캘리포니아와 소노라라는 멕시코 주에 대한 이전의 공격과는 달리(두 침략 모두 빈약한 군수 계획과 멕시코의 비정규군과의 교전으로 워커가 국경으로 후퇴하고 미군에 항복하게 되면서 끝이 났다.), 워커는 La Falange Americans, 즉 미국의 팔랑크스로 알려진 자유 미국 군대를 지휘했다. 하지만 군사적으로 성공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운명의 회색 눈의 남자"로 알려진 워커는 자유 군대 지도부와 싸우기 시작했다. 궁극적으로, 워커는 쿠데타를 일으켜 1856년에 니카라과의 대통령으로 이름을 붙였다. 노예 제도의 합법화와 영어를 공식 언어로 확립한 워커 대통령의 임기는 짧았고,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자와 결합된 군대는 그를 미 해군 함정과 함께 은신처로 만들도록 강요했다. 1860년 이후의 원정은 온두라스에서 총살형에 의해 워커의 공개 처형을 초래했다.

7. 프레더릭 타운센드 워드(Frederick Townsend Ward)

19세기 대부분의 미국 군사 모험가들과 달리, 프레드릭 타운센드 워드는 남부 태생의 귀족이 아니었다. 매사추세츠 세일럼의 아들인 워드는 쾌속 범선을 탄 선원으로 삶을 시작하였다. 그의 이국적인 위험을 처음 맛본 것은 그의 뉴잉글랜드 배와 선원들이 청 왕조가 통치하는 홍콩에 정박했을 때였다. 버몬트에 있는 노리치 대학(당시에는 미국 문예 사관 학교로 알려져 있었다.)에서 잠시 시간을 보낸 후 워드는 바다로 돌아가 선원으로, 그리고 훗날에는 용병으로 이 날의 여러 가지 중요한 행사에 참여했다.

1860년대에 워드는 중국으로 돌아왔고, 중국은 약 2천만 명의 사망자를 낸 종교적 광기에 의해 촉발된 수십 년간의 내전으로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일에 바쁘다.

상하이 외곽 몇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기지에서 워드는 서양에서 훈련을 받고 미국 국외 추방자들을 포함시킨 친 청군인 상승군(常勝軍)을 지휘하였다. 1860년, 워드의 서구 용병들은 태평천국 반군들이 상하이를 장악하는 것을 막았지만, 축하 대신에 명목상으로 중립적인 영국군에 의해 체포되었다. 탈출 후 워드는 서구 장교들이 이끄는 중국군으로서 자신의 부대를 재편성했다. 이 새로운 군대는 보통 청군들에 의해 오만하고 경멸당하지만 땅에서 여러 번 승리를 거두었고, 따라서 주저하는 청나라 정부는 이 군대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게 되었다.

"스워시버클러"로 알려진 워드는 1862년에 전투에서 사망했고, 그의 상승군은 태평천국 반군들로부터 츠시라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시를 점령하려 했다. 워드는 네차례 총에 맞았고 머스킷 총알을 배에 대고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6. 요제프 비쇼프(Josef Bischoff)

 

러시아 혁명은 로마노프 가문의 몰락만을 야기한 것이 아니다. 1917년에,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등 미래의 독립 국가들을 독일로 넘어가게 했고, 이로 인해 의도치 않게 중세 시대 북방 십자군 원정의 일환으로 발트해를 지배하던 중세 독일 십자군인 튜튼 기사단의 국가가 재창조한 것이었다. 독일군은 점령군으로서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의 독일 발트해 소수 민족을 민족주의 운동 역할을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러시아의 침략성에 대한 방벽으로 선호했다.

독일군대가 1918년에 떠났을 때, 여러 명의 퇴역 군인들과 발트해 귀족들은 그 지역을 떠나는 것을 거부했고 그 대신에 자유 군단으로 알려진 준군사조직를 설립했다.

독일 바이마르의 거리 싸움에 더 잘 알려져 있고 독일의 초창기 국가사회주의 단체이었지만, 몇몇의 자유군단 부대는 1918년 이후에 발발한 여러 독립전쟁 동안 발트국가에서 활동했다. 발트에서 가장 유명한 자유 군단 부대는 직업 군인이었던 독일 육군 소령인 요제프 비쇼프가 이끌었던 철 사단(Iron Division)이었다. 1919년에 철 사단은 붉은 군대의 침입에 맞서 쿠를란트 라트비아 지역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비쇼프 소령 하에서, 자유군단과 다른 발트 독일인 부대들은 발틱 주의와 반 볼세비키 운동을 약탈과 이득을 위한 전쟁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더욱 불길한 것은, 많은 자유군단 병사들이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를 독일의 땅으로 간주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아돌프 히틀러를 집권하는 데 도움이 될 민족주의적 태도 유형을 보였다. 

비쇼프에 관해서는 발트 독일인이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에 민족 국가를 설립하지 못한 이후에도 반공 활동을 계속했다. 1920년대에 비쇼프는 우크라이나 도시인 오데사에서 반 볼세비키 선전 센터를 운영했을 뿐만 아니라 히틀러의 실패한 맥주홀 폭동에도 관여했다.

5. 채텀 위트(Chatham Wheat)

 

미국 남북전쟁 애호가들에게, 채텀 위트라는 이름은 루이지애나 호랑이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루이지애나주 보병의 제1특수대대와 동의어이다.

193센티미터(6'4")와 125kg(275lb) 무게의 위트 하에서 타이거스는 북아프리카의 "주아브"처럼 옷을 입고 당시 프랑스 육군에서 복무하고 있던 그는 남부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부대 중 하나로 알려지게 되었다. 적절하게도, 소령 위트는 1862년 1차 콜드 하버의 전투에서 사망했다.

미국 사이의 전쟁 전에, 위트는 멕시코, 쿠바, 그리고 니카라과의 여러 건의 필리버스터 전쟁에 참여했었다. 멕시코 전쟁에서 미군과 함께 복무한 후, 위트는 베네수엘라의 용병인 나르시소 로페스와 계약했고 뉴올리언스에서의 수송뿐만 아니라 루이지애나에서 온 병사들도 그에게 약속했습니다. 그 목표는 쿠바였고, 그 당시 쿠바는 스페인 제국에 대항 한 또 다른 혁명에 휘말렸다.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밀도 모험심과 쿠바 재산에 대한 약속 때문에 로페즈와 합류하려고 했다. 후에 위트는 니카라과에 있는 윌리엄 워커의 군대와 함께 복무하게 된다.

교육을 받은 변호사이자 성공회 목사의 아들인 위트는 전쟁을 마치 하나의 큰 무모한 장난처럼 여겼던 자연스러운 몽상가였다. 이것은 그가 전쟁에서 전쟁과 원인의 원인까지 뛰어들었는지 이유를 설명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심지어 남북 전쟁 직전에도, 위트는 주세페 가리발디의 붉은 셔츠를 위해 이탈리아에서 싸우느라 바빴다.

4. 머리안 C. 쿠퍼(Merian C. Cooper)

머리안 C. 쿠퍼는 위험한 생활을 좋아했다. 비록 플로리다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쿠퍼는 해군 사관학교에서 쫓겨난 후에 스스로 힘든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그는 중서부에서 처음으로 언론인이 되었으며, 쿠퍼는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미 육군 항공대에 합류해 서부전선에서 DH-4를 비행한 후에 전쟁이 끝날 무렵 독일군의 사격을 받고 격추당했다.

쿠퍼는 연합군의 참전에 대해 공헌에 만족하지 못하고 전투 비행사로서 유럽에 머물렀다. 붉은군대가 1920년 폴란드를 침략했을 때, 쿠퍼 대위는 혁명적 전쟁 기간에 미군과 나란히 싸웠던 폴란드의 애국자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의 직접적인 경의를 표하는 미국 전단 대대인 코시치우슈코 비행대대를 조직했다.

코시치우슈코 비행대대는 약 250개의 전투 임무를 수행하는 동시에 폴란드 전쟁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는데, 이 중 하나는 볼세비키의 기병대가 모스크바의 승리를 들려주기 위해 바르샤바에 도착하지 못하도록 지연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반복되자 쿠퍼의 비행기는 볼셰비키 전선에서 격추되어 미국의 비행사는 러시아 교도소에서 6개월 동안 몸을 쇠퇴하게 만들었다. 그는 마침내 도보로 바르샤바로 도망쳤다.

민간인으로서 쿠퍼는 다큐멘터리 영화 제작자로 자신을 유명하게 만들 킹콩으로 스스로 명성을 얻었다. 쿠퍼는 평생 동안 제작자로서 할리우드의 프로듀서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지만, 모험에 대한 열망은 멀지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쿠퍼 대령은 중국에서 클레어 첸노트 장군의 플라잉 타이거스와 함께 비행했다.

3. 나르시소 로페스(Narciso Lopez)

윌리엄 워커처럼, 나르시소 로페즈는 19세기에 가장 활동적인 필리버스터 중 한 사람이었다. 베네수엘라에서 태어난 스페인 장군 로페즈는 그의 일생의 대부분을 쿠바를 스페인 통치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바쳤다. 그러나 대부분의 병사들이 미국 남부에서 왔고 로페즈가 명시한 목표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계획은 쿠바는 미국의 노예 주가 되는 것이었다.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은 1851년에 스페인군에 의해 그가 처형되기 전에 로페즈는 1850년에 상륙한 후 쿠바 땅에 쿠바 국기 날린 첫번째 인물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로페즈의 쿠바 국기 디자인은 공식 국기로 통합되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날고 있다.

텍사스 독립운동에 의해 설립된 초기 원형에 이어, 1850-1851년 로페즈의 군사 원정은 미국 용병들과 쿠바 이주자들 모두를 군인으로 이용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 전역에서 영어와 스페인어로 친쿠바 간행물을 만든 선동가들도 이용했다.

로페즈의 필리버스터 운동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가 남긴 청사진은 호세 마르티와 쿠바 지식인과 병사들에 의해 포착되었으며, 1898년 미군의 도움을 받아 1898년 쿠바는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2. 필로 맥기핀(Philo McGiffin)

 

필로 T.맥기핀은 평범한 해군 장교로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 펜실베니아 태생인 그는 1882년 미 해군사관학교를 처음 졸업했고, 1885년에 태평양 전대에 들어갔다. 이것은 맥기핀의 경력 궤적이 비뚤어졌다. 왜냐하면 젊은 중위는 해군 전체에서 할 수있는 임무가 없었기 때문에 퇴역했기 때문이다.

맥기핀은 집으로 향하고 새로운 무역을 배우는 대신, 톈진에 있는 해군 사관학교의 장교이자 강사로 청 제국 해군에 합류했다. 당시에 고군분투하고 있던 청나라는 함대를 현대화하려 했고, 그래서 맥기핀과 다른 서양인들은 장교 자리를 꽤 쉽게 찾았다. 그러나 맥기핀은 특혜를 누리는 것에 만족스럽지 않았다.

청불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맥기핀은 새로운 세대의 중국 선원들을 현대적인 전투 방식으로 교육하기 위해 매년 1,800달러를 요청했다. 맥기핀의 노력으로 맥기핀 또한 곧 실험대에 오른 해전에 대한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개발했다.

1894년 일본의 급성장하는 힘이 철저한 합병을 앞두고 한반도에서 중국의 지배를 벗어나기 시도하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압록강 전투 중에 맥기핀은 장갑함 진윈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 전투는 전체 전쟁 중 가장 규모가 큰 해군 전투로, 맥기핀이 미국 잡지에 전투 보고서를 게재하기로 약속한 이후에 전설적인 사건이 되었다. 진원이 일본의 모든 공격을 격퇴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맥기핀은 전투 중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육체적, 정신적 상해로 고통받는 맥기핀은 1897년 2월 자신의 뉴욕 병원에서 방에 권총을 몰래 가져가고 자살했다.

1. 제임스 롱(James Long)

텍사스 혁명 수십년 전에 그리고 텍사스 독립 공화국의 창설 수십 년 전에, 미국 육군 외과 의사이자 뉴올리언스 전투의 베테랑인 제임스 롱은 미국을 위해 텍사스의 스페인 영토를 주장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미시시피로 이사해서 제임스 윌킨슨 장군의 딸과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롱 교수는 장인어른에게 그의 모험에 은행 융자를 요청했다. 그 늙은 병사는 동의했다. 전설에 따르면, 롱 교수는 또한 텍사스의 첫 번째 공화국을 건립하기 위해, 자신의 사병을 나코그도치스로 보내기 전에 앤드류 잭슨에게 축복을 구했다고 한다.

1819년, 많은 사람들이 스페인령 텍사스에 대한 미국의 주장을 포기한 것으로 믿고 있는 애덤스-오니스 조약에 대해 롱과 다른 이들은 군사 여행에 대한 많은 재정적 후원자들을 발견했다. 땅을 얻고자 하는 욕망에 이끌려 롱과 그의 부하들은 75명의 미국인들과 나체즈를 떠났고, 300명의 미국인, 멕시코인, 그리고 아메리카 원주민 용병들과 함께 나코그도치스에서 활동을 끝맺었다. 1819년 6월 23일, 나코그도치스에있는 롱 대령의 부하들은 텍사스의 독립을 선언했다.

처음에, 롱 교수는 동 텍사스에 체계적인 합의를 도출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이는 곧 땅을 떠나 살기 위한 산발적인 시도로 전락하였다. 크리올 해적인 장 라피트가 갤버스턴을 신생 공화국의 일부라고 주장하게 한 후, 롱은 스페인 역습에 앞서 요새 건설에 나섰다. 스페인령 텍사스 주의 마지막 주지사인 안토니오 마리아 마티네즈는 결국 500명이 넘는 병력을 나코그도치스에 파견하고, 그의 부하들을 미국 영토로 다시 몰아넣었다.

실패에 빠지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롱은 재편성하었고, 나중에 볼리바르 지점에서 텍사스의 골리어드로의 군사 원정에 합류했다. 이 시점에서 스페인령 텍사스는 멕시코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이 지역에서 미국의 지속적인 동요로 인해 군사적으로 강화되었다. 그러자 강력한 멕시코군이 롱을 포로로 잡아 멕시코시티의 감옥으로 보냈다. 6개월 후, 롱은 롱의 전 동맹들중 한명에 의해 매수 한 것으로 추정되는 한 교도관에 의해 저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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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listverse.com/2015/10/11/10-filibusters-and-military-adventurers-from-history/

 

예전에 번역한건데 러시아 내전에 활동한 인물들도 있기 때문에 올려봅니다. 번역체가 많아서 지적 받습니다.

본문을 읽으면 알겠지만 여기서 필리버스터는 국회 의사 진행 방해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Posted by 李蘭胡

러시아내전에서 표트르 브랑겔 장군의 러시아군이 흑해 함대의 전력을 흡수해서 만들어진 백군의 함대입니다. 정식 명칭은 러시아 해군 대대이고, 브랑겔의 함대라고 부릅니다. 20세기초 러시아 군함 포스팅에는 내전 시절이 누락되어서 알지도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들의 한을 풀어줄려고 소개하게 됐습니다.

그러나 브랑겔의 함대는 함생이라 해봐야 그렇게 볼 것도 없었습니다. 대략 러시아 흑해 함대에서 독일 해군/소비에트 해군/우크라이나 국가 해군 중 하나에 있다가 세바스토폴에 정박하자마자 러시아 백군과 연합군이 점거하고 난 뒤 해안지대에 적군 상대로 포격전을 하다가 1920년 11월 14일에 콘스탄티노플로 망명하고 프랑스 튀니지에서 한동안 난민 수용선으로 이용되다가 1930년대 초에 프랑스 민간 기업에게 매각되어 서글픈 해산식을 마치고 해체 처분으로 일생을 마친 경우가 대부분.

전후 소련에게 다시 양도된 함선은 정말 몇 없고 소련에 양도된 경우에는 ★표시.

게네라르 알렉세예프 전함(Mikhail Alekseyev 장군의 이름을 땀.)

- 백군 함대의 기함. 원 이름 : 임페라트리차 마리야급 전함 임페라트르 알렉산드르 3세.

- 튀니지에서 프랑스 해군이 압류하고 수리받았다. 정비도 받지 않은 상태라 함의 상태는 지금까지 움직일 수 있는데 신기할 정도였다고.

- 일부 무장은 핀란드로 넘어가서 독소전쟁에 쓰였습니다.

게오르기 포베드노세츠 전함

- 원 이름 : 예카테리나 2세급 전함 4번함

- 임시정부 > 독일제국 > 우크라이나 > 소비에트 러시아로 최종적으로 백군 함대로 옮겼습니다.

- 일반 시민이 많이 타던 배였는데, 프랑스 정부가 정교회 교회를 새워주웠다고 합니다.

 

게네라르 코르닐로프 순양함(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의 이름을 땀)

- 원 이름 : 보가티르급 순양함 4번함 오차코프.

알마즈 순양함
 
- 쓰시마 해전과 1914년 사리치 곶 해전에 참가한 배.
- 1918년 초에 오데사 소비에트에 합류. 적군 시절에는 구 러시아 해군의 많은 장교들이 감금, 고문, 사형당한 "해군 법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꺼삐딴 사켄(Капитан Сакен) 구축함
-정보 없음.


베스파코이니(Беспокойный) 구축함

-특이하게 이 배는 프랑스군이 지휘했습니다.


데르즈키(Дерзкий) 구축함

-워쉽에 나오는 소구축 맞습니다.


 



그녜브늬(Гневный) 구축함

-프로젝트 7형 구축함 아니고 노빅급 구축함과 동형함.
 
필키(Пылкий) 구축함

-영국군이 지휘했습니다. 시슬리뷔급 구축함 3번함.

파스페시니(Поспешный) 구축함

-영국군이 지휘(2). 시슬리뷔급 구축함 5번함. 


트세리고(Цериго) 구축함
-피도니시급 구축함 7번.

자르키 (Жаркий) 구축함★

즈본키 (Звонкий) 구축함★

조르키 (Зоркий, 1904)  구축함★


튤렌(Тюлень) 잠수함
-모르시급 잠수함 3번함

부레베스트니크(Буревестник) 잠수함
-바급 잠수함.

AG-22(АГ-22) 잠수함
H급 잠수함의 러시아판. 1차 세계대전에 조립식으로 주문했는데 1919년에야 완성되었습니다.

우트카(Утка) 잠수함
-바급 잠수함.

 

이외에 수많은 건보트등이 있으나, 자료도 안 나와서 생략하고 흑해 외에 카스피해, 시베리아 등이 있으나 함대라 부를수 없는 수준이라 생략하겠습니다.

Posted by 李蘭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