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Kwon/goola2023. 10. 6. 00:25

누라리횬

오래간만에 만설 좀 하겠습니다.

원래 나는 괴력난신을 좋아하지 않아 귀신 등이 나오는 작품은 보지 않는데,

어쩌다 보니 이걸 보게 됐네요. 누라리횬이란 이름이 재미 있어서였던 것 같습니다.

기실 이 망가는 요괴의 탈을 쓴 야쿠자물인데,

누라리횬(본래는 일본에 옛날부터 있던 요괴인데 요괴들의 두목으로 불리기도 했음) 은 수백년 전부터 살았던 요괴의 오야붕으로, 요괴 주제에 인간으로 변신까지 가능해서, 잘생긴 남자가 되어 당시 교토 귀족의 딸로 여러 사람들이 노렸던 요우히메를 보쌈해 갑니다. (요괴의 수명은 천년 정도로 설정됨)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짓인지는 시대극을 본 사람이라면 다 알지요. 신분이 낮은 남자와 신분이 높은 여자의 결혼이나 보쌈은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남자는 살아남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누라리횬은 이것을 해낼 수 있는 능력과 대담함이 있었습니다. 족보도 없는 누라리횬이 비교적 젊은 나이에 요괴의 대장이 된 것이나, 귀족 계집을 도망가지 못하게 하고 자기를 공격하지 못하게 한 것이나, 엄청난 존재였던 겁니다.

그리고 아들 누라리한을 낳았으나, 얼마 안 가 다른 요괴와 싸우다가 저주를 받아 자식을 낳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누라리한은 요괴조직의 수장 답게 영주의 딸이었다가 요괴가 된 야마부키 오토메와 혼인하였는데,

이것으로 볼 때에 누라 일족은, 천한 신분을 세탁하려고 매우 애썼던 것이 확실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으니, 누라리횬이 저주를 받을 때에 누라리한과 그 외 누라 가문의 모든 자손들은 요괴로부터는 자손을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수백 년을 같이 살았어도 자녀가 없자 1920년경 오토메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내쫓기고, 이후 수십년을 지나 현대에 이르러 누라리한은, 자손을 잇기 위해 아마도 야쿠자의 딸로 추정되는 인간 게집을 얻어 만화의 주인공인 리쿠오를 낳았으나, 반은 인간이므로 요괴의 수명의 반만 물려받아 500세경에 죽었습니다.

어찌 되었든, 그래서 리쿠오는 요괴 호적상으로는 오토메의 아들로 올라간 것이고, 리쿠오의 생모는 '첩'으로 기록되는 것입니다.

요괴들도 먹고 살아야 하고, 굶으면 죽는 건 인간과 같으니, 누라리횬은 제대로 설명은 안 되어 있으나 야쿠자들이 하는 것처럼 여러 불법적인 일에 관련하여 이들을 먹여 살렸으며, 그래서 겉보기에는 저택도 크고 재산도 많아 보이나 실제로는 인간으로 변신하여 수입을 창출할 수 없는 요괴들이 거기서 밥만 축내고 있어서, 실속은 적었습니다.

그런데, 대대로 누라 일족을 섬긴 설녀 (눈 속에 산다는 녀자요괴) 집안이 있었고, 이 집안은 누라 가문의 밥짓기, 설거지, 애보기 기타 허드렛일을 맡아 한 것으로 보아 그다지 요괴들 중 레베루는 높지 않았다고 보여집니다.

설녀 세츠라는 누라리횬의 아내가 되고 싶어했으나 야망이 큰 누라리횬은 그녀에게 만족할 수 없었고, 누라리횬이 요우히메와의 사이에서 낳온 리한을 돌보면서 종노릇을 합니다.

세츠라는 명치유신 이전에 애비 없는 딸을 낳았고, 이 딸은 이름도 없이 만화 초기에는 그냥 설녀라고 불립니다.

주인공 리쿠오는 1/4만 요괴이므로 250년의 수명을 갖고 태어났으나 일반인처럼 학교에 다니고 그렇게 살면서, 학교에서 인기가 좋은 카나, 그리고 교토 명문가의 자손으로 음양사인 유라 등과 얽힙니다.

리쿠오는 기울어 가는 누라 일족들을 지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싸움을 하면서 버티어 나가는데,

문제는, 만화가 진행되어 가는 과정에서, 인간인 카나나 명문가의 딸 유라 등의 비중은 줄어들고,

리쿠오도 학교에 거의 가지 않고 요괴들이 득실거리는 집에서 싸울 준비를 하는 과정이 늘어나면서,

집에서 허드렛일하는 하녀인 설녀의 비중이 따라서 늘어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이름도 없던 설녀에게 '츠라라' 라는 이름이 붙더니, 어느 샌가 '오이카와' 라는 인간식 성씨까지 붙여졌습니다.

이 만화가 연재된 게 2006-2012년인데 아마도 작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지 , 2번이나 애니메화된 작품이지만 갑자기 스토리가 늘어지기 시작하여 중단된 거나 마찬가지로 끝난 작품인데 (이후 이 작가는 제대로 된 작품이 아직 없음)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하는 요괴라도, 결국 땅에 발을 붙이고 다니는 존재이니 (날아다닐 수는 있으나 중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음),

결국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던 모양입니다.

모든 것이 다 끝난 시점에서, 카나, 유라는 어디 갔는지도 모르게 사라졌고,

겨우 목숨만 건진 리쿠오는 츠라라의 인도를 받아 저택에 돌아오면서,

리쿠오는 자기보다 150살 이상 나이가 많은 하녀와 이어진다는 상당히 비극적인 결말이 되겠습니다. 요괴의 나이를 인간의 나이와 같이 볼 수는 없으나, 어쨌든 리쿠오가 태어났을 때 이미 츠라라는 명치유신 전부터 누라 가를 섬겼으니, 일본 정부가 2번이나 완전히 뒤엎어지는 걸 본 존재입니다. (할아버지나 아버지는 자기보다 어린 배우자를 얻었음)

요괴에서는 자손을 볼 수 없다는 설정은 마지막에 사라진 것으로 했으나, 어쨌든 할아버지, 아버지 다 괜찮은 혼맥을 만들었지만, 손자 대에 이르러서는 문자 그대로 식순이와 결혼하게 된 게 아니겠습니까?

발전하던 시대에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문의 발전을 위해 애썼지만,

몰락하는 시대에서는, 자기 집에 말려 둔 곶감이나 먹고 연명하라는 이야기 되겠고,

이런 스토리가 공감이 되었으니 이름도 없던 캐릭터가 주인공으로 격상된 것이지요. 츠라라에게 있어서는 비록 기울어지긴 했어도 주인집 아들이니 신분상승이기는 하니까.

누라 가문이 요괴의 신분을 딛고 인간세상에서 인정받으려 한 노력은, 결국 3대째에 무너져 버렸다는 비극적인 스토리 되겠습니다.

Posted by 李蘭胡